병원 창구에서 진료비 내역서를 떼러 오신 분이 조심스럽게 물으실 때가 있습니다. “회사랑 공상으로 하기로 했는데요, 이 금액이면 되는 걸까요?” 산재 대신 회사와의 합의를 택했거나 택해가는 중인 분들이 마지막에 막히는 질문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얼마면 적당한 건지, 그리고 서명하고 나면 정말 끝인지.
답부터 말씀드리면, 공상 합의금에는 법정 정가가 없고 합의서의 범위가 이후 민사상 권리를 좌우합니다. 일반 합의서에 산재 신청 포기 문구가 있다고 공단 청구권이 자동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성질의 손해를 이미 보전받았거나 제3자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경우, 법원 화해를 한 경우에는 보험급여와 손해배상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산재 처리와 공상 처리의 기본 차이는 산재 처리 vs 공상 처리, 무엇이 다르고 무엇을 잃게 되나요?에서 먼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Contents 목차 09 SECTIONS
합의금에는 ‘정가’가 없습니다
산재보험 급여는 법이 계산식을 정해 둡니다. 일을 쉰 기간에는 평균임금의 70%, 장해가 남으면 등급에 따른 연금이나 일시금, 이런 식입니다. 반면 공상 합의금은 법 어디에도 기준이 없는 사적 계약의 금액입니다. 부르는 쪽과 받는 쪽이 정하기 나름이라는 뜻이고, 실제로 회사가 처음 내미는 금액은 대개 “지금까지 나온 치료비에 위로금 얼마를 얹은” 수준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상의 값은 치료가 끝나봐야 압니다. 지금까지의 치료비는 확정된 숫자지만, 치료가 더 길어질지, 일을 얼마나 더 쉬게 될지, 장해가 남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숫자입니다. 합의금이 적당한지를 판단한다는 것은 결국 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몫”까지 담겨 있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물론 하루 이틀 통원으로 끝나는 가벼운 상처라면 애초에 산재 요양급여의 대상이 아니어서(3일 이내 요양은 지급 제외), 회사 부담으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경계 이야기는 위에 소개한 공상 비교 글에서 다뤘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경계를 넘는 부상, 즉 며칠 이상 쉬어야 하는 부상의 합의를 전제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잣대는 하나입니다. 산재였다면 받았을 것들
합의금을 가늠할 때 최소한의 비교선은 산재로 처리했을 때 법이 지급하는 목록입니다.
- 요양급여
- 산재로 인정된 상병의 치료 중 산재 기준이 인정하는 비용을 공단이 부담합니다. 건강보험 비급여도 산재에서 인정될 수 있고, 산재 기준 밖의 비용은 본인 부담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 휴업급여
- 일하지 못한 기간에 대해 평균임금의 70%가 지급됩니다. 치료가 길어지면 받는 기간도 그만큼 늘어납니다
- 장해급여
- 치료가 끝난 뒤 장해가 남으면 등급에 따라 연금 또는 일시금이 지급됩니다
- 재요양
- 치료 종결 후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요양을 신청할 길이 법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목록에 대고 회사의 제시액을 놓아 보면 판단이 또렷해집니다. 제시액이 “이미 나온 치료비”만 덮고 있다면, 앞으로의 치료·휴업·장해·재발이라는 위험을 전부 내가 떠안는 계약입니다. 특히 장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부상이라면 서둘러 서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해급여는 이 목록에서 가장 큰 금액이 되기 쉬운 항목인데, 장해가 남을지는 치료가 끝나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합의서 문구, 이 대목을 보셔야 합니다
공상 합의서에 단골로 들어가는 문구가 있습니다. “향후 본 건과 관련하여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다.” 이 문구는 가볍게 넘길 표현이 아닙니다. 대법원은 합의 당시 알았거나 예상할 수 있었던 손해에는 권리 포기나 부제소 합의의 효력이 미칠 수 있고, 당시 예상하기 어려웠던 후발 손해는 합리적인 의사 해석에 따라 제외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합의 당시의 진단, 예상 치료기간, 금액 산정 근거와 문구를 함께 봅니다.
구조부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회사를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 청구는 당사자 사이에서 합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산재보험 급여는 근로복지공단에 청구하는 법률상의 권리이고, 법은 수급권의 양도·압류·담보 제공을 금지합니다(산재보험법 제88조). 따라서 일반 사문서에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다”고 적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단의 접수나 심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합의금이 실제로 어떤 손해나 근로기준법상 재해보상까지 정산한 것인지는 보험급여 조정에 영향을 줍니다. 대법원도 합의금에서 유족보상·장사비에 해당하는 손해를 명확히 제외한 사안에서는 그 급여 청구권이 남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회사와 작성한 일반 사문서가 아니라 제소전 화해나 재판상 화해를 권유받았다면 바로 서명하지 마세요. 법원 조서에 적힌 화해는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어 적어도 당사자 사이의 민사상 권리관계를 강하게 확정합니다(민사소송법 제220조). 일반 공상 합의서와 같은 방식으로 나중에 다툴 수 있는 문서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합의금은 이렇게 정산됩니다
그럼 합의금을 받고 나서 산재를 신청하면 이중으로 받게 되는 걸까요. 법은 여기에 답을 정해 두고 있습니다.
수급권자가 동일한 사유로 민법이나 그 밖의 법령에 따라 이 법의 보험급여에 상당한 금품을 받으면,
공단은 그 받은 금품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방법에 따라 환산한 금액의 한도 안에서 이 법에 따른 보험급여를 지급하지 아니한다.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80조 제3항
풀어 말하면, 먼저 받은 돈 가운데 보험급여와 같은 성질로 같은 손해를 메우는 금액은 공단이 그 환산액 한도에서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보험급여가 먼저 지급되면 같은 사유에 대한 사용자의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그 범위에서 줄 수 있습니다(제80조 제2항). 대법원은 여기서 “동일한 사유”를 단순히 같은 사고가 아니라 서로 같은 성질의 손해를 보전하는 관계로 해석합니다.
실무에서 다툼이 생기는 지점은 받은 돈의 실제 성격입니다. 치료비는 요양급여, 일을 못 해 잃은 소득은 휴업급여 등과 대응할 수 있습니다. 산재보험급여가 정신적 손해 자체를 보전하는 것은 아니므로 위자료는 원칙적으로 같은 항목이 아니지만, 합의서에 “위로금”이라고만 써 두었다고 자동으로 공제 대상에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항목별 산정표와 이체 내역을 함께 남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양쪽에서 지급이 끝났다면 언제나 “회사 돈은 그대로 두고 공단 급여만 빼면 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급 순서와 신고 내용에 따라 공단의 일부 부지급, 사용자의 배상책임 감액, 잘못 지급된 보험급여의 징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제84조). 받은 돈과 합의서를 숨기지 말고 신청서에 정확히 알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제3자가 끼어 있으면 합의 순서가 더 중요합니다
교통사고처럼 회사가 아닌 제3자의 행위로 산재가 발생하면 산재보험법 제87조가 적용됩니다. 공단이 먼저 보험급여를 지급하면 그 범위에서 근로자의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하고, 근로자가 먼저 같은 손해의 배상을 받으면 그 범위에서 보험급여를 지급하지 않습니다.
민사 손해배상은 별도의 계산입니다
산재보험은 업무상 재해와 각 급여 요건을 충족하면 사용자 과실이 없어도 지급되는 제도입니다. 반면 회사를 상대로 한 민사 손해배상은 안전배려의무 위반이나 불법행위 책임 등 별도의 책임 근거와 과실·인과관계를 따집니다. 산재보험급여와 같은 성질의 재산상 손해는 중복 전보되지 않지만, 위자료나 법정 급여로 메워지지 않은 손해까지 언제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효도 섞어 세면 안 됩니다. 산재보험법 제112조는 보험급여 청구권을 원칙적으로 3년, 장해급여·유족급여·장례비 등을 5년으로 정합니다. 각 급여의 기산점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권은 민법 제766조에 따라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 원칙입니다. 계약책임을 근거로 하는 청구는 적용 조문과 기산점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사고 후 3년” 하나로 모든 권리를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서명 전 확인 목록
지금까지의 내용을 서명 직전에 훑을 수 있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 주치의에게 치료 종결 전망과 장해 가능성에 대한 소견을 들었다
- 합의금에 앞으로의 몫(추가 치료·휴업·장해·재발)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 합의 당사자가 회사인지 제3자·보험사인지 확인했다
- 합의금의 실제 목적과 산정 근거(치료비·휴업손해·위자료)가 항목별로 적혀 있다
- 산재보험 급여, 민사상 일체의 청구, 예상하지 못한 후발 손해를 어디까지 정리하는지 확인했다
- 일반 사문서인지 법원의 제소전·재판상 화해인지 확인했다
- 산재 급여별 시효와 민사 손해배상 시효를 각각 달력에서 짚어 봤다
저는 병원 원무과에서 합의에 쓰실 진료비 내역서나 진단서를 발급해 드리는 일까지가 제 몫이라, “이 금액이면 적당하냐”는 질문에는 답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 계산에는 앞으로의 치료 전망과 장해 전망, 이미 받은 돈의 성질까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금액이 크거나 장해가 걱정되는 부상이라면, 서명하기 전에 노무사 등 전문가에게 합의서를 보여주고 셈을 맞춰보는 비용이 잘못 서명한 뒤에 다투는 비용보다 훨씬 적게 듭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합의서에 이미 서명했는데 치료가 자꾸 길어집니다. 산재 신청이 되나요?
산재 신청하면 받은 합의금을 돌려줘야 하나요?
회사가 합의서에 '산재 신청은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자고 합니다.
공상 합의금은 얼마가 적당한가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
합의서는 서두르는 쪽이 불리해지는 문서입니다. 부상의 최종 값은 치료가 끝나봐야 알 수 있는데, 서명 뒤에는 문구와 당시 자료가 판단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사와 얼굴 붉히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그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몫이나 제3자에 대한 권리까지 넘겨주는 서명이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서명 전에 이 글의 확인 목록만이라도 한 번 짚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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